2008년 4월. 미국 하와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여동생을 만났다. 한국언론재단과 미국 동서센터(EWC)가 주관한 한미언론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동안 주최 측이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한국 기자 7명과 미국 기자 7명 모두 14명의 기자가 마야와 '비공식' 인터뷰를 가졌다.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의 여동생 마야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마야 소에토로 응. 오바마의 이부(異父) 여동생이다. 미국 캔자스 출신 백인 어머니가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결혼해 오바마를 낳았고, 인도네시아에서 재혼해 현지인 남편과 사이에 마야를 출산했다. 오바마 의원이 똑똑하고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야도 지적인 데다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커다란 눈,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기자들은 "당장에 TV 토크쇼를 진행해도 될 만큼 세련된 외모와 목소리"라고 입을 모았다.
마야는 1970년생 우리 나이로 39살이었다. 현재 하와이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남편은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다. 이날 딸을 데리고 나왔는데 아주 귀여워 현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인터뷰 도중 손짓을 하며 설명하고 있는 마야.>
<마야의 딸이 엄마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다.>
마야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초반까지만 해도 오빠 오바마의 유세를 지원했다. 그의 역할은 오바마 유세 지역에 며칠 먼저 도착해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정치인이 그가 언론과 정치에 지나치게 노출돼 신변의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해 중반 이후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가 말 한마디 실수라도 하면 오바마 캠프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시기여서 언론과의 접촉도 극도로 삼갔다. 마야는 그동안 전세계 어느 언론과도 공식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날 인터뷰 또한 오바마 선거 캠프에서 오프더레코드(off-the-record), 소위 '비보도' 전제로 허락한 것이었다.
마야는 그동안 유세에서 연설을 많이 한 듯했다. 오바마 의원에 대한 그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이 답했다. 답변이 술술 나왔을 뿐만 아니라 마치 원고라도 보고 읽는 듯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답변을 쏟아냈다. 마야는 오빠 오바마와의 어릴 적 추억, 어머니의 가르침, 가족사 등에 대해 털어놨다. 당시 당내 경선 상대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에 대한 오빠의 생각도 일부 귀띔했다. 기사가 되기에 충분한, 흥미로운 만남이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비보도 전제였다.
40여 분 동안의 만남이 끝나고 마야는 “만남이 즐거웠다”며 자리를 접었다. 그리곤 마지막까지 강조했다.
“오늘 이 미팅은 오프더레코드입니다. 사진은 마음껏 찍어도 좋지만 보도에 쓰면 안 됩니다. 그냥 개인적인 추억으로 간직하세요.”
그날 힘들게 시간을 낸 마야나 기자들 모두 아쉬웠지만, 기념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누군가 던진 농담에 마야가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한국언론재단 사진)>
<미국 하와이대학 동서센터에서 마야 소에토로 응과 기념사진.(한국언론재단 사진)>
그로부터 넉 달 후. 오바마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뒤 미국 동서센터에 다시 연락을 취했다. 인터뷰 내용상 이제 기사로 써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도 많이 흘렀는데, 마야 인터뷰를 기사로 써도 될까요?”
“미안하지만 여전히 안 되겠습니다. 마야 측에서 오프더레코드를 원하고 있는 만큼 그걸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래서 그날 마야와의 인터뷰는 지금도 내 취재수첩 속에, 빛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썩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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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얘기>
2008년 11월4일.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에 따라 오프더레코드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판단돼 마야 인터뷰 기사를 출고했다.
[단독] 여동생 "오바마 순한 얼굴 뒤에는 지독한 승부욕 감춰져 있어"
세계일보 11월5일자
<오빠인 오바마에 대해 얘기를 하는 동안 마야의 목소리엔 힘이 들어갔다.>
“오빠(버락 오바마)는 많은 미국인이 이젠 국가가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이라는 새 역사를 쓴 민주당 오바마 당선자의 이부(異父) 여동생 마야 소에토로 응(38·사진). 그는 “존 매케인은 할 수 없고 오바마는 할 수 있는 게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와이 라피에트라 고등학교 교사인 마야와의 만남은 지난 4월15일 하와이대학에서 이뤄졌다. 한국언론재단과 미 동서센터(EWC)의 언론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뤄진 이 인터뷰는 당시 대선에 미칠 영향 등을 우려해 비보도 전제로 성사됐으나, 4일 오바마가 당선됨에 따라 공개한다.
마야는 오바마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1995년 사망)과 인도네시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야는 1976년 오빠가 하와이의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3일 사망)의 슬하에 들어갈 때까지 같이 지냈고, 이후 1년에 한두 번씩 만나며 우애를 다졌다.
마야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오바마는 ‘가장’이었다. “내가 9살 때 엄마가 두 번째 이혼을 하면서 오빠는 가족의 중심에선 남자였다. 나를 키운 건 엄마지만 나를 가르친 건 오빠였다. 책과 음악, 자원봉사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줬다. 아빠가 할 일을 오빠가 대신했다.”
사람들이 모르는 오바마의 비밀을 하나 알려달라고 했다. 마야는 순해 보이는 오바마 얼굴 이면엔 지독한 승부욕이 감춰져 있다고 귀띔했다.
오바마가 받은 ‘어머니로부터의 유산’은 무엇일까. 마야는 독서와 사람에 대한 사랑을 꼽았다. “어머니는 세상 곳곳에서 다양한 삶과 사랑을 경험하셨다. 모든 사람은 똑같다고 늘 강조하셨다. 책을 가까이하셨고 우리에게도 엄청난 양의 책을 읽게 하셨다. 특히 언어를 사랑했다. 오빠가 영감을 불어넣는 연설을 하는 것도 어머니 영향인 것 같다.”
마야는 민주당 경선 초반까지 오바마의 유세를 지원했다. 유세 지역에 며칠 먼저 도착해 분위기를 띄우는 게 역할이었다. 하지만 한마디 말 실수가 치명타가 될 수 있는 경선 중반부터 활동을 거의 접었다.
잠시나마 미 대선에 참여한 소감을 물었다. “네거티브 공세가 가장 힘들었다. 비난을 위한 비난이 난무했다. 오빠와 아버지가 무슬림 광신도라는 둥 왜곡된 악성 루머들이 인터넷에 쏟아져 순식간에 확대·재생산됐다. 오빠가 이를 미리 경고해 줬지만, 막상 직접 대하니 당황스러웠다”고 마야는 회상했다.
마야는 그동안 유세 연설을 많이 한 듯했다. 목소리는 힘이 넘쳤고,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호놀룰루(하와이)=안석호 기자 sok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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