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그루지야 고리.

 눈과 섞인 빗방울이 차창을 거세게 때렸다. 차는 트빌리시에서 출발해 그루지야 동서를 가르는 유일한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라고는 했지만 포장 상태가 좋지 않아 차가 덜컹거렸다. 노폭도 좁아 큰 차가 마주 오면 우리 차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때때로 부딪힐 것 같은 아찔한 상황도 연출됐다. 비 오는 날이라고 잔뜩 틀어놓은 실내 히터 때문에 차창 유리는 뿌옇게 김이 서렸다. 내내 손바닥으로 유리를 닦아냈지만 금세 다시 흐려졌다. 현지 가이드 스베타는 좌우로 지나가는 경치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하지만 창밖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루지야 카프카스 지방 한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스탈린 동상.


 일행을 태운 차는 고리로 향했다. 그루지야 수도 트비리시에서 약 80km 떨어진 고리는 교통의 요지다. 130년 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사내가 전세계는 물론, 한반도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리는 옛 소련의 지도자 이오지프 스탈린(1878∼1953·본명 이오셉 주가슈빌리)의 고향이었다.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 고리 시내로 진입했다. 차는 조금도 헤매지 않고 스탈린 생가 박물관으로 직행했다. 스탈린 생가는 공원처럼 조성돼 있었다. 평일인데다 오후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생가 관람객이 별로 없었다.

 공원 중앙에 자리 잡은 박물관 문이 닫혀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경비실 같이 생긴 곳의 문을 두드렸다. 텅 빈 건물의 복도에 ‘탕탕‘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윽고 안내인으로 보이는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베타가 한참 동안 얘기를 주고 받았다. 사무실로 다시 들어간 할머니는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다시 나왔다. 박물관에는 난방이 전혀 안 되고 있었다. 난로를 피워 놓은 사무실을 벗어나 전시실로 들어갈 때면 오히려 외투를 입어야만 할 정도였다. 늦은 시간 불청객이 마뜩찮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직업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루지야 악센트가 섞인 영어였다.
 “한국에서 왔다고요?”
 스베타가 한국, 먼 곳에서 왔으니 특별히 안내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예.”
 “저는 박물관 가이드 에카테리나입니다. 따라오세요. 그루지야엔 처음이신가요?”
 “네. 처음입니다.”
 “잘 오셨어요. 스탈린 박물관은 그루지야에 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입니다. 스탈린은 위대한 인물이지요.”

 스탈린. 에카테리나는 그가 마치 자신의 할아버지라도 되는 양,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소개했다. 스베타는 나만 남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동안 박물관 설명을 수도 없이 들었다며 나중에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스베타는 에카테리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제 박물관에는 에카테리나와 나, 둘 뿐이었다.  에카테리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그루지야인으로서 거대 제국 소련을 통치한 스탈린에 대한 자부심을 대단합니다. 오늘날 그루지야는 스탈린과 같은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입니다.”
 2003년 ‘장미혁명’으로 민주화된 그루지야에 다시 스탈린식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가이드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반박하거나 논쟁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이드도 자기 의견은 있는 거니까.

스탈린 박물관 전시동 건물.

 박물관에는 정확히 몇 개인지 알 수 없는 전시실이 방방마다 꽤 근사하게 장식돼 있었다. 대리석 기둥들이 높은 천정을 떠받들고 있는 전시실 내부는 웅장하고 권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카펫이 깨끗하게 깔려 있고, 계단 한 가운데 스탈린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전시실에는 스탈린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 공산당 지도자로서의 활동기까지 일대기 유물이 보관돼 있었다. 그가 읽고 썼던 책들, 책상, 의자, 옷가지, 세계 각국에서 받은 선물 등이 전시실마다 가득했다. 특히 해외에서 받은 선물들은 모아놓은 방이 이목을 끌었다. 중국 등 각국 공산당 지도자가 스탈린에게 보내온 도자기 등 선물이 눈에 띄었다. 북한의 김일성이 보낸 선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지막 전시실은 엄숙했다. 조명이 어두웠으며 방음 장치를 따로 했는지 발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전시실이 바뀔때마다 녹음기처럼 설명을 쏟아내던 에카테리나도 침묵했다. 혼자 느끼고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중앙엔 스탈린의 데스마스크가 있었다. 그가 죽은 직후 떴다는 데스마스크는 스탈린이 지금 막 숨져 누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많은 정적을 죽이고 유배시키고 전 세계를 양분하고 갈등하고 호령했던 스탈린이 거기에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만 남은 채 처연하게 누운 모습에선 '철의 통치자' 스탈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권불십년, 인생무상이었다.

스탈린 박물관에 전시된 스탈린 가족사진. 가운데 스탈린을 중심으로 좌우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스탈린이 사용했던 책상과 사무용품.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만들었다는 데스마스크.




 에카테리나의 열정적인 전시실 투어는 40분 정도 걸렸다. 밖으로 나오자 박물관 뜰 한가운데 스탈린이 태어난 집이 보였다. 스탈린 생가는 통째로 더 큰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큰 집 아래 작은 집이 둘러싸인 듯한 모습이었다. 스탈린 생가 주변에 기둥을 심고 그 위에 다시 지붕을 덮어 집 위의 집을 만들어 버렸다. 이날은 관람객이 거의 없었지만 경비원은 두 명이나 생가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스탈린이 태어난 집입니다. 아시다시피 스탈린의 아버지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구두를 고치며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에카테리나가 집 정문 옆에 반지하로 된 쪽문을 가리켰다. 생가는 실내로도 들어갈 수 있었다. 스탈린이 태어났다는 침대며, 가족이 썼던 가구도 그대로 있었다.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담았다. 경비병들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스탈린 생가를 지키는 경비병.



스탈린 생가 내에 전시된 침대. 스탈린이 이 침대에서 태어났다고 함.





  생가 뒤켠엔 스탈린의 ‘애마’가 전시돼 있었다. 비행기를 타는 걸 싫어했던 스탈린은 전세계 어디를 가든 기차를 이용했고 한다. 이곳에 전시된 객차가 바로 스탈린 전용 객차였다. 에카테리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유명한 얄타회담 때도 스탈린이 바로 이 기차를 타고 회의에 참석을 했습니다. 유서 깊은 객차죠.”
 1945년 얄타회담을 참석하기 위해 스탈린이 탓던 기차라는 설명을 들으니 느낌이 남달랐다. 스탈린이 영국의 처칠 수상,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반도의 신탁통치 윤곽을 그렸던 바로 그 회담이 아닌가. 그때 이 기차가 없었더라면, 아니 스탈린이 탄 기차가 테러를 당해 폭파라도 됐더라면 한반도의 운명도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스탈린이 얄타회담에서 빠지고, 나중에 김일성과의 만남도 이루어 지지 않았더라면 또 어땠을까.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을 수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깟 기차 한 대가 어떻게 된다고 해서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릴 수는 없겠지만, 막상 보고 있으려니 엉뚱한 생각이 이어졌다.
 

스탈린의 전용 기차 객실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루지야 현지 가이드 스베타와 스탈린 박물관 가이드 에카테리나.




스탈린 전용기차 내부.


 몇 년 전 공개된 러시아 기밀문서에 따르면 처음에 한국전쟁을 반대했던 스탈린은 일단 전쟁이 터지자 주도적으로 작전을 세우는 등 거의 전권을 행사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그는 아예 한국전쟁을 ‘냉전’의 라이벌 미국의 국력을 소진할 기회로 삼았다는 분석도 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북한에 불리해진 뒤 김일성이 요청한 휴전제의도 거듭 무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소련의 입장은 1953년 그가 숨진 뒤에야 휴전 쪽으로 급선회한 것으로 전해진다(서울신문 1995년 5월15일자 참조).

 스탈린뿐만이 아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카프카스산맥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그루지야는 러시아를 호령한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스탈린 시절 서슬퍼런 비밀경찰인 ‘체카’의 총수였던 라브렌티 베리야도 그루지야 출신이고, 소련 외무장관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이끌었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도 그루지야 출신이다. 어떻게 보면 20세기 현대사의 최대 이슈 ‘미·소 냉전’의 막을 올린 것도 그루지야인(스탈린)이요, 냉전을 종식시킨 것도 또한 그루지야인(셰바르드나제)이었다.

1945년 얄타에 모인 영국 처칠 수상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스탈린(왼쪽부터).

 옛 소련시절부터 현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그루지야는 많은 인물을 정계에 배출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탄압과 핍박의 대상이 됐다. 스탈린은 젊었을 때 그루지야 민족주의에 심취했지만, 나중에 레닌의 마음을 사기 위해 고향인 그루지야를 배신했다. 한때 그루지야어를 없애는데 앞장서는 등 배반 행위를 자행했다. 이 같은 '배신'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그루지야가 친미 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정계에 진출한 그루지야계 인사들은 좌불안석이 됐다. 이 때문에 자신의 족보를 세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루지야인들에게 스탈린은 애증이 교차한다. 신·구 세대 간에도 차이가 있다. 당장 이날 내가 만난 두 그루지야인, 스베타와 에카테리나도 스탈린에 대한 입장이 나뉘었다. “스탈린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여전히 스탈린 향수에 젖어 있는 60대 가이드 에카테리나가 있는가 하면, “스탈린 때문에 사할린 출신 고려인 조부모가 이곳까지 강제 이주하게 됐다”며 적의를 드러내는 20대 스베타도 있다. 요즘 그루지야 젊은이들 사이에선 스탈린을 그저 "그루지야 출신 세계적인 명사"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스베타가 귀띔했다. 

 하지만 사망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스탈린은 여전히 러시아인들의 영웅이다. 최근 러시아 TV 프로그램이 여론조사를 한 결과, 스탈린이 러시아를 상징하는 위대한 인물 3걸에 뽑혔다. 1위는 네바강 유역에서 스웨덴인의 동진을 막은 국가영웅 알렉사드로 네브스키 왕자(1211∼1263), 2위는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치하에서 근대화와 개혁을 이끈 표르트 스톨리핀 총리(1862∼1911), 그 뒤를 스탈린이 이었다.
 러시아의 식을 줄 모르는 스탈린 사랑은 2008년 러시아의 그루지야 침공때도 드러났다. 러시아군은 그루지야 중부 전략도시 고리를 점령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과 포격을  퍼부었지만 스탈린 박물관만은 전혀 손상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카프카스 취재를 도와준 현지 프리랜서 기자 고가가 스탈린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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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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