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트빌리시.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에서 남쪽으로 약 20㎞ 떨어진 가르다바니에는 그루지야 최대 정유·송유시설인 가르다바니 석유·가스 스테이션(GOGS)이 세워져 있다. 허허벌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 중계소는 약 3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반인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된다. 차가운 공기의 흐름을 따라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웅∼’하는 묵직한 기계소음만이, 저 멀리 담장 너머에서 뭔가 대단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음을 암시해줄 뿐이다.

가르다바니 석유·가스 스테이션(GOGS) 전경. 사진=그루지야 석유·가스공사(GOGC) 제공.


 세계에서 가장 긴 송유관 BTC라인이 바로 이곳 땅속을 지난다. 카스피해 산유국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aku)에서 시작해 그루지야의 트빌리시(Tbilisi)를 거쳐 터키의 제이한(Ceyhan)까지 연결된 송유관은 총 연장이 1770㎞에 달한다. 송유관은 세 도시 이름의 첫글자를 따 BTC라인으로 불린다. BTC라인 사업은 영국 석유메이저 브리티시 페트럴리엄(BP) 등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11년 간 36억달러를 들여 2005년 완공했다. GOGS 내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은백색 파이프 라인들은 세계 6대 유전으로 꼽히는 카스피해 석유와 가스를 받아 국내 수요분과 유럽 공급분을 나눠 중계한다. 시설 한쪽에선 해외로 보내질 석유와 가스를 계량해 통과세를 매기고, 다른 한쪽 초대형 저유 탱크와 정유시설은 내수용 디젤유를 생산해낸다.

송유관 매설작업 현장. 사진=그루지야 석유·가스공사(GOGC) 제공.


그루지야 송유관 매설 공사현장. 크레인이 파이프라인을 땅 속에 묻고 있다. 사진=그루지야 석유·가스공사(GOGC) 제공.


 그루지야 내 BTC라인 248㎞ 구간의 운영을 총괄하는 그루지야 석유·가스공사(GOGC)를 방문했다. 최근 트빌리시 외곽으로 사옥을 옮겼다는 GOGC는 건물 내부가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에너지 회사라고는 믿기 힘들게 난방도 넉넉하지 못했다. 1층 로비에는 안내표지도 잘 정비되지 않았고, 어디서 내장 공사라도 하는지 페인트 시너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안내를 하는 경비실 직원들은 두꺼운 외투를 그대로 껴입고 있었다. 

 경비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사니콜로즈 바샤키제 GOGC 대외협력이사 사무실로 올라갔다. 뱌사키제 이사가 두툼한 손을 내밀어 반갑게 맞았다. 거대 에너지회사 간부에 어울리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목소리 또한 굵고 거칠었다. 그루지야어 특유의 경음과 격음이 뒤섞여 강한 인상을 풍겼다. 인사를 마친 바샤키제 이사는 곧바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벽에 걸렸던 그루지야 지도를 사무실 중앙의 커다란 책상 위에 내려 놓더니 석유·가스 산업 현황을 설명했다.
 “이곳은 카스피해 석유와 가스를 그루지야와 유럽으로 공급하는 심장부입니다. BTC라인은 카스피해 원유 일일 생산량 220만∼300만배럴의 30∼50%를 지중해로 운반하죠. 지정학정 위치가 좋아 양질의 석유·가스가 우리 땅 밑을 많이 지나갑니다.”

 그루지야에는 BTC라인 외에 바쿠∼트빌리시∼흑해 항구 수프사를 연결하는 ‘BTS 송유관’과 바쿠∼트빌리시∼터키 에르주룸을 잇는 ‘SCP 가스 파이프라인’도 있다. 이들 파이프라인은 모든 구간이 깊이 1∼2m의 땅 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실제로 볼 수는 없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그루지야 땅속에는 전 세계 원유 생산량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의 석유가 흐르는 셈이다.

 그루지야의 석유·가스 파이프 라인의 의미는 남다르다. 이를 통해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1위이자 원유 매장량 3위인 카스피해 유전의 원유와 가스가 러시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서방 세계로 빠져나간다. 최근 서방세계의 석유 메이저와 주요 석유 소비국들이 그루지야의 BTC라인 완공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가 그루지야의 친서방화 정책에 남달리 신경을 쓰고 견제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는 최근 몇년동안 그루지야의 송유관 사업에 촉각을 바싹 곤두세우고 있다. 서방국가와 그루지야가 러시아의 ‘앞마당’ 카스피해의 석유와 가스를 아무런 통제없이 빨아가는 꼴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2003년 ‘장미혁명’ 이후 그루지야 정부가 친미·친서방 성향을 보이면서 러시아의 신경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급기야 러시아는 2006년 11월 그루지야에 공급하던 천연가스 가격을 1000㎥당 110달러에서 230달러로 두 배 이상 올리는 강수를 뒀다. 그러자 그루지야는 아제르바이잔 등을 통한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로 맞섰다. 그루지야가 이처럼 러시아에 당당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거미줄처럼 깔린 파이프라인 덕분이다.

그루지야 석유가스 스테이션(GOGS). 사진=그루지야 석유·가스공사(GOGC) 제공.

 그루지야가 파이프라인 유치·운영을 통해 직접 벌어들이는 수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GOGC에 따르면 BTC라인의 경우 연간 수입은 약 5000만달러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루지야 정부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가스·오일 파이프라인 사업을 멀리 내다보고 진행하기 때문이다. 당장 비싼 통과세를 받아 이익을 챙기기보다는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유치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힘 주력하고 있다. 트빌리시 집무실에서 만났던 주라브 노가이델리 그루지야 (전) 총리는 이 같은 장기전략을 설명했다.
 “세계 최장의 BTC라인을 보유함으로써 우리도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활동에 참여할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루지야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국제 원유시장의 안정에도 기여하고 있는 것이죠.”

 그루지야는 안정적 에너지 공급과 국제적 위상 확보를 통한 경제 도약을 꿈꾼다. 민주화 정부가 들어선 이래 그루지야는 ‘개혁국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국제금융공사(IFC)가 매년 발행하는 기업환경보고서 ‘경제개혁 우수국가’ 부문에서 그루지야는 2005년과 2006년 각각 1, 2위를 차지했다. 계속된 개혁으로 경제성장도 탄력을 받았다. 지난 수년간 10%에 육박하는  경제 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과의 경제 협력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트빌리시 시내에 드문드문 보이는 삼성과 LG 간판이 양국 간 경제 협력의 서막을 알린다. 현재 한국의 중견 건설업체인 창조E&C 등과 1조원 규모의 트빌리시 도시개발 사업을 진행 중이다.

 가르다바니 석유·가스 스테이션에서 낮게 들려오는 소음은 그루지야의 심장이 뛰는 박동소리와도 같다. 보이지 않는 이곳 내부의 움직임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힘차면 힘찰수록 도약을 꿈꾸는 그루지야의 경제 엔진도 거세게 달아오른다.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 시내 택시 기사가 차량을 손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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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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