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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8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
  2. 2008/07/23 아무나 못하는 동굴 탐사 (2)

2006년 3월. 북한 개성.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개성으로 향했다.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방치됐던 북관대첩비를 101년 만에 북한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행사에 동행취재를 나선 것이었다. 광화문에서 경의선 도라산역 남북출입국사무소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북한을 가는 것은 해외여행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통일부에서 여권 비슷한 방북증명서를 발급받고 남북출입국사무소에서 ‘출입국 신고’까지 해야 한다. 여행객들은 금속탐지기를, 수화물은 엑스선 검색대를 지나야 한다. 내가 개성을 방문한 2005년은 민간인의 개성 관광이 불허됐던 시기였다. 금강산 관광은 허용됐지만 개성은 갈 수 없었다. 금강산 관광특구 같이 통제된 지역이 아니라 개성이라는 실제 도시에서 북한 주민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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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역 내 서울과 평양을 가리키는 이정표. (허정호 사진)>


 남측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하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출입국 수속을 모두 마친 뒤 일행을 태운 버스는 휴전선으로 향했다. 휴전선 남측 경계선에 다다르자 국군 두 명이 커다란 철책 문을 열었다. 반대편 철책문 너머로 무장한 북한 인민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버스가 휴전선 철조망 문을 지나 북측으로 넘어가자 인민군 초소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부터는 인민군 지프가 에스코트를 했다. 지프 안에 무장한 채 앉아 있는 인민군을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못 돌아오는 건 아닌가. 북한 관리들 변덕이 죽끓듯 하던데, 갑자기 심사가 뒤틀려 우리를 억류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물론, 남북한 당국 간 공인된 행사에 그런 불상사가 생길 리는 없었다. 하지만 경직된 인민군 병사 얼굴을 쳐다본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철책을 조금 지난 곳에 북측 출입국사무소에 버스가 다시 섰다. 버스에서 내린 일행은 경계를 서는 인민군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건물로 들어갔다. 길게 놓인 책상들을 사이로 북측 ‘입국심사원’과 우리 일행이 줄지어 섰다. 북한 사람을 코앞에서 대하긴 처음이었다. 숨소리도 들릴 거리였다. 하지만 서로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여권과 수화물만 점검했다. 늦겨울 추운 바깥날씨만큼이나 냉랭한 대접이었다. 모든 일행의 신분확인 끝난 뒤 마침내 휴전선 북측 철책문이 열렸다. 버스가 스스르 북쪽 땅으로 미끌어졌다. 뒤를 보니 더 이상 국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부터 북한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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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가려는 사람에게 통일부가 발급하는 방북증명서. 방문목적과 기간 등이 적혀 있다.>


 버스는 북한 병사들을 뒤로하고 북으로, 북으로 내달렸다. 옆으로 개성 공단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공단지대 풍경과 비슷했다. 100만평 대지에 큰 도로가 잘 닦여 있고 듬성듬성 공장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신원 에벤에셀’ ‘한국토지공사’ 등 눈에 익은 간판들이 보였다. 개성 공단은 북한보다는 남한의 손길이 더 많이 닿는 곳이었다. 도로나 철제 담장, 가로등이 모두 남한식이었다. 개성공단을 벗어나서야 ‘진짜 북한’이 시작됐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도로엔 차가 거의 없었다.

 개성은 멀지 않았다. 휴전선에서 개성까지 약 40분. 그렇게 가까운 곳에 북한 ‘제2의 도시’ 개성이 있었다. 3월 초였지만 아직도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개성 외곽의 산은 대부분 민둥산이었다. 상당히 높아 보이는 산 거의 꼭대기 지점까지 나무가 없었다. 덮인 눈 사이로는 붉은 흙이 드러났다. 특히 마을에 가까운 산에는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보기가 힘들었다. 버스에 동승한 행사 관계자가 설명했다.
 “산에 나무가 없는 게 보일 겁니다. 북한 주민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너도나도 베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늘 같은 겨울 풍경이 여름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그나마 쌓인 눈이 민둥산을 덮어 정겹기라도 하거거든요. 눈이 없는 계절의 벌거숭이 산, 마을은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말 그대로 적나라(赤裸裸)한 모습이었다. 생기 넘쳐야할 봄 여름 풍경보다 차가운 눈 덮인 겨울 풍경이 낫다니, 가슴이 아려왔다.

 마을에 보이는 가옥엔 30년은 족히 됨직한 오래된 기와들이 흉물스럽게 지붕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그런 기와도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창문엔 유리 대신 비닐이 바람을 막아는 주는 집들이 곳곳에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 창은 힘없이 펄럭였다. 한 식료품 가게 앞에는 50여명은 돼 보이는 주민이 줄을 서 있었다. 개성까지 가는 동안 차량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개성에서 평양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승용차 한 대 마주치기가 힘들 때도 있다고 한다. 버스 서너 대가 줄지어 가는 우리 일행을 주민들이 그토록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 보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에는 남한에서 온 것임을 암시할 만한 것은, 한글이든 영어든 모두 가렸다. 다만 차량 옆면에  ‘북관대첩비 101년만의 귀환’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여 놓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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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는 개성 시민들. (AFP사진)>

 개성 시내에 풍경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기실은 휴전선을 넘어서면서부터 풍경이 그랬다. 디지털카메라 특수촬영 기능으로 찍는 ‘세피아’ 사진과 비슷했다. 짙은 원색은 없고 흐릇한 파스텔톤의 색채만 남아 있었다. 60년대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빛이 다 바랠 대로 바랬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은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생명력의 상징인 ‘초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계절이 이른 탓도 있지만 가꾸어지는 나무도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옷색깔도, 건물의 외벽도 간신히 옅은 색감만 간직하고 있었다.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

 빛바랜 흑백 도시에 선동문구만은 핏빛으로 도드라졌다. 큰 건물 입구와 벽면, 사람 많은 네거리엔 어김없이 커다란 선동문구가 보였다. 대부분 새빨간 색으로 적어놓은 선동구호들은 핏줄처럼 개성 시내 요지에 퍼져 있었다. ‘21세기 횃불 김정일 장군 만세!’  ‘미제를 타도하자!’ ‘21세기 선군정치 만세’…. 이날 내가 북한 땅에 있음을 가장 실감하게 하여 준 것은 이들 선동문구였다. 자극적으로 내걸린 선동문구들은 생명력이 사라진 흑백의 개성 거리와 대조적이었다. 곳곳에 내걸린 선동구호들은 마지막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혈액 공급을 받는 것처럼 처절하게 다가왔다.

 개성에도 고층 건물들은 있었다. 높은 것은 10층이 되는 것도 있었다. 베란다마다 가득 쌓인 연탄이 눈에 띄었다. 산에 나무는 다 베어갔고, 아파트는 연탄을 떼고…. 북한의 극심한 전력난이 여실히 드러났다. 큰 길 가를 따라 아파트 등 신식 건물이 제법 늘어서 있었다. 대로변 건물에는 새로 칠한 도색이 주변과 어울리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바로 뒤편에는 60년대식 건물들이 즐비했다. 아스팔트가 포장된 거리엔 아직도 달구지가 짐을 싣고 다녔다. 건물만 60년대식이 아니라 삶 자체가 그 시대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거리엔 군복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남루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많은 것도 이채로웠다. “북한에서 선글라스와 금장 손목시계가 최고의 선물”이라고 누군가 설명했다.

 점심 식사는 개성 유일·최고의 호텔이라는 자남산려관에서 했다. 개성에서 가장 좋은 접객시설이라 했지만 우리의 기준으로는 소박해 보였다. 대리석 외관은 무게감 있게 보였지만 내부 장식은 썰렁했다. 난방마저 시원찮아 식당인 대연회장에선 입김이 보일 정도였다. 음식은 남한에서 먹는 것과 비슷했다. 돼지갈비, 오징어 졸임, 각종 튀김과 전, 시래깃국 등. 조미료를 많이 넣지 않아서인지 맛은 자극적이지 않았다. 일행 중 일부는 음식이 맞지 않는다며 과일만 연신 집어 먹었다. 그러나 과일 맛 역시 민숭민숭했다. 비료가 많지 않은 북한은 땅이 기름지지 않아 과일도 당도가 떨어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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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제1의 호텔이라는 자남산려관 입구에서>



 식당에서 여성 접대원 동무에게 말을 걸었다. 남측 관광객이 금강산에 가면 의례 북한 관광안내원에게 말을 시켜 문제를 일으킨다더니, 나도 그랬다. 북한 동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얘기 한 번 나눠 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루기란 쉽지 않았다. 북한에선 식당 종업원에게 ‘아가씨’라고 불러선 안 된다고 했다. ‘동무’ 또는 이름표에 적힌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했다. 어색한 호칭은 다 빼고 대뜸 물었다.
 “이런 식사 한 끼에 얼마 정도 합니까?”
 “조(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질문에 얼굴부터 붉히던 아가씨, 아니 접대원 동무는 이 말과 함께 음식 접시만 내려놓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남측 사람과 대화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는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자남산련관 식당 접대원은 거의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볼에만 살짝해 순진해 보였다.
 
 이날 북관대첩비 반환 공식행사는 고려박물관에서 열렸다. 고려시대 사적인 성균관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고려박물관에는 금속활자와 고려청자 등 유물 1000여점이 전시돼 있다고 했다. 일정이 길지 않아 제대로 둘러 보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기념품 하나는 챙겼다. 남측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급히 벌인듯한 박물관 좌판 매대에서 그림을 한 점 샀다. 북한 화가 작품으로 그림은 조악해 보였지만, 기념으로 사두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문화재청의 유홍준 청장은 10cm크기의 미니어처 고려청자를 몇 개 사서 일행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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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고려박물관에서 판매하는 미니어처 고려청자. 높이가 약 10cm정도 밖에 안되지만 청자 색깔은 제법 그럴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 들렀다. 자남산련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선죽교는 개성에서 꽤 유명한 관광지인 듯했다. 그럴듯한 안내원도 배치돼 있고, 사적지임을 알리는 간판도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 일당에게 철퇴로 피살될 때 흘렸다는 핏자국은 선죽교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모두들 그 혈흔 뒤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비좁은 선죽교는 한바탕 소란을 겪어야 했다. 선죽교는 통행을 제한에 건너다닐 수 없었다. 대신 바로 옆에 나란히 돌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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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 선죽교. 가운데 기둥 앞에 정몽주의 핏자국이 불그스름하게 아직도 남아 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돌아오는 길의 북측 출입국관리소 더욱 까다로웠다. 허리에 총까지 찬 북한 측 검사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식사진기(디지털 카메라)를 켜서 찍은 사진을 다 보여주시라요.”
 남측 일행은 관광지나 북측이 지정한 장소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북한 시내나 주민의 모습을 찍는 건 금지돼 있었다. 이는 이날 행사를 위해 남북 간 합의한 사항이었다. 일행 모두가 디지털 카메라를 켜 찍은 사진을 다 보여준 뒤에야 통관할 수 있었다. 일행이 탄 버스가 남측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자 국군 병사들이 에스코트했다. 어찌나 반갑고 늠름해 보이던지. 평소에 그렇게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군국 위장복조차 멋있게 보였다.

 남쪽으로 달리길 한 시간여. 때마침 퇴근시간 러시아워에 걸려 차량의 홍수에 휩싸였다. 화려한 서울의 야경 속에 개성에서 잠시 ‘죽었던’ 오감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자동차와 화려한 거리의 조명이 시각을 자극했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는 활력의 소리로 귀를 깨웠다. 동맥처럼 끝없이 늘어선 차량 후미등의 행렬은 북한의 선동구호를 대신해 생명의 박동을 전달했다.
 
 버스가 다시 아침에 출발한 광화문에 섰다. 이날은 앙골라와의 국가대표 축구 평가전이 벌어지던 날이었다. 광화문 거리엔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가 모여 있었다. 골이라도 터졌는지 다 같이 그 익숙한 소리를 외쳐댔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아! 돌아왔구나.”
 완전 딴 세상이었다. 불과 한 시간 여 거리에 있는 서울과 개성, 남북한 두 도시의 풍경은 이렇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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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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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충북 제천.

 제천의 깊은 산중. 지름이 약 2m 정도 되는 시커먼 동굴 입구가 하늘을 향해 떡 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입구 언저리에 조심스럽게 발을 얹었다. 한발은 안전한 뭍 쪽에, 다른 한 발은 입구 가까이 어정쩡하게 걸치고 몸을 기울여 구멍 아래를 들여다 봤다. 깊어서인지 어두워서인지, 끝은 보이지 않았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한 번 감싸고 지나갔다. 마치 ‘함부로 나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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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박쥐동굴의 비경 (허정호 사진)>



 한국동굴연구소 김련(33) 부소장과 탐사대원 최형순(강원대 동굴탐사동호회)씨의 동굴 탐사 작업에 동행했다. 호기심 반, 기대 반 따라나섰지만 막상 시커먼 내부를 들여다 보니 겁부터 났다. 수직으로 난 동굴 입구는 진흙 범벅이었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입구에서부터 자일(등산용 밧줄)을 타고 동굴 안 직벽을 20m 정도 내려가야 했다. 김 부소장은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행동은 터프했다. 180cm 정도 되는 키에 굵은 팔뚝과 가슴을 자랑했다. 시퍼렇게 턱을 덮은 수염은 모험가의 이미지를 더했다. 나이는 33세로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전문가의 풍모가 물씬 풍겼다. 김 부소장이 자일과 안전 헬멧, 무릎보호대, 장갑을 주며 말했다.

“군대에서 레펠(높은 곳에서 자일을 타고 내려가는 것) 해 보셨죠? 제가 먼저 갈 테니 따라오세요.”

‘자, 잠깐만요’라고 말할 틈도 없이 김 부소장이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이곳을 다녀갔던 듯, 그는 거침없이 내려갔다. 위쪽은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느새 바닥에 도착한 김 부소장. 그제서야 위를 보며 소리쳤다.

“자! 내려오세요.”
“예.”

 대답은 씩씩하게 했지만, 긴장됐다. ‘내가 인디아나 존스냐? 혼자 알아서 내려오라고?’
자일을 단단히 잡았다. 하네스 등 안전장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동굴을 향해 발과 엉덩이를 조심스레 들이밀었다. 동굴 입구는 먹이를 삼키기 직전 침이 넘치는 뱀의 목구멍처럼 미끌미끌했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계곡물이 입구를 거쳐 동굴 속으로 계속 스며들고 있었다. 미끄러운 벽에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자일에 대롱대롱 매달려 여기 부딪히고 저기 뒹군 다음에야 아래 바닥에 발이 닿았다.
  죽지 않겠다고 얼마나 자일을 꽉 잡았던지 벌써 손아귀가 절이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 이제 동굴 입구는 저 멀리 머리 위에 있었다. 하얗게 보이는 동굴 입구 너머로 파란 하늘과 구름 몇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꽤 들어왔구나’

 먼저 들어온 김 부소장은 자일과 장비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나는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해 주변 사물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머리 위에 뒤집어 쓴 헤드 랜턴을 켰지만 멀리 보이지 않았다. 김 부소장은 동굴 속살을 빨리 보여주고 싶었던지, 아니면 초보 ‘탐사대원’이 귀찮았던지, 채근했다.

“자, 또 갑시다.”
“잠깐만요. 눈이 좀 적응하면 가죠.”
 김 부소장이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 15m 깊이의 낭떠러지를 건너야 하니, 차라리 잘 안 보이는 게 나을 겁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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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이날 이같은 벼랑과 절벽을 몇개나 넘어 다녔다.>



인생은 녹록하지 않은 법. 하고 싶은 건 잘 안 되고 보기 싫은 건 잘 보인다. 눈은 빠르게 어둠에 적응했고, 믿기 싫었던 절벽이 눈 앞에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굴 속 좁은 공간에 이 정도 규모의 절벽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김 부소장이 하는 대로 단애 끝자락을 잡고 디디며 조심조심 한발씩 나아갔다. 벼랑밑 깊은 곳에서 몰려온 찬바람이 힁하니 샅을 훑고 지나갈 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기서 떨어지면 끝이다.’ 자원해서 따라 나선 길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심 또 조심할 뿐이었다.
 박쥐동굴은 일반에 공개된 제주도 만장굴이나 단양 고수동굴 등과는 다르다. 조명이나 안전시설이 일체 없고 사람이 똑바로 서서 이동할만한 공간도 충분히 확보돼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은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자칫 길을 잃거나 안전사고를 당하면 그대로 목숨까지 위험하기 십상이다.
가까스로 건너편에 도달했을 때 김 부소장은 안 보였다. 그는 이미 커다란 바위 밑으로 사라졌다. 50㎝도 안 되는 바위 틈 저편에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타고 김 부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서 기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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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바위 틈새를 기어서 지나가는 탐사대원.>



 바위 틈을 기고 벼랑 끝에 매달리기를 몇 번이나 더 했을까. 온몸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됐다. 입구로부터 얼마나 들어왔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위쪽으로 올라온 것인지 아래쪽으로 내려온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 시간여를 들어오자 박쥐동굴이 서서히 신비로운 속살을 드러냈다. 불빛이 비치는 구석구석 새로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천길만길 낭떠러지가 위협하는 듯싶더니 곧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계곡이 시원한 노래를 불렀다. 바위를 넘어가면 고운 모래밭이 펼쳐졌고, 조그만 바위 틈 뒤에는 커다란 공간이 숨어 있었다. 동굴 벽은 검은색에서 흰색, 붉은색, 황색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석회암이 물에 녹아서 만든 종유석과 종유관, 석순은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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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동굴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 아래 쪽에 석순이 보인다.>



“멋있죠? 동굴 마니아들 대부분은 외계에서나 봄직한 이런 비경 때문에 동굴에 미치게 되죠. 저도 대학 1년 때 여기에 반해 지금까지 이러고 있습니다.”

김 부소장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동굴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해 약 4개월을 동굴에서 보낸다. 탐사 중인 동굴 속에서 며칠씩 먹고 자는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450여 개 국내외 동굴을 다녔다고 했다.

 전진 또 전진. 또다시 기고 매달리기를 한 시간. 드디어 동굴 막장에 도달했다. 동굴 끝에는 반경 4∼5m의 넓은 공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탐사 동호인들의 용어로는 바로 ‘동방(洞房)’이다. 사람이 꾸부정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높이였고 바닥은 평평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시커먼 물체가 ‘철썩’ 하고 뺨을 때리고 지나갔다. 인기척에 놀란 박쥐였다. 자기 집을 침입한 불청객에게 던지는, 달갑지 않다는 인사치레였을까. 촉감은 부드러웠다. 박쥐동굴이란 이름에 걸맞잖게 이날 박쥐는 많지 않았다. 두 마리가 전부였다.

 먼저 동방에 들어앉은 김 부소장이 재미난 제안을 했다. “진짜 암흑 한 번 경험해 보실래요?”하면서 모두에게 랜턴을 끄라고 했다. 랜턴이 모두 꺼지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가 손을 흔들고 있는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빛이 전혀 없는 곳에선 어둠에 익숙해진 눈도 소용없었다. 빛도 소리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부드러운 융단이 감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진정한 ‘암흑 세계’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갇히면 누가 우릴 찾아낼 수 있을까’, ‘랜턴이 고장 나면 어떡하지’ ‘우리가 지나온 길에 돌이라도 무너져 내려 있으면 어쩌지’….   지금 머리 위와 아래로는 산과 흙과 물이 있고, 우리는 실핏줄과도 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차차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빛과 소리, 외부와 완전 차단된 동굴 속은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일반에 공개된 관광 동굴에서는 받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동굴탐사대는 이런 곳에서 무엇을 조사하는 것일까. 김 부소장은 “우리는 주로 동굴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발달했는지 등을 조사해 동굴 지형도를 그립니다. 그러면 지질학자들이 이를 토대로 동굴 속 광물의 생성 원인이나 특징, 생성물, 지하수 등을 연구하죠”라고 설명했다. 동굴은 특히 지질·지구과학자들에게 중요 연구 대상이다. 동굴 생성물의 연대를 측정하고, 내외부 환경과 기후 변화 등을 분석해 지구 환경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연구한다. 동굴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인류의 흔적은 중요한 고고학 자료가 된다. 동굴에만 사는 희귀 생물들은 난치병 치료를 위해 연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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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꽃' 석화와 갈르와 벌레, 박쥐 등 다양한 동굴 생태계 모습들. 이날 박쥐동굴에서 찍은 것은 아니다. (석동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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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동굴 탐사활동 사항을 기록하고 있는 김련 한국동굴연구소 부소장(오른쪽)과 최형순 대원. (허정호 사진)>


 희귀한 암흑 체험을 마치고 밖으로 향했다. 들어올 때와 나올 때 동굴은 전혀 다른 모습을 연출했다. 들어갈 땐 몰랐는데 나오면서 보니 동굴 곳곳에 훼손된 자국이 보였다. 떨어져 나간 종유석과 꺾인 석순 주변에는 어김없이 철삿줄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인간의 ‘더러운’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 이처럼 험한 동굴 속, 이 깊은 지점까지 도굴꾼이 설친다는 게 놀라웠다.

 김 부소장은 “우리나라 동굴 보호 실태는 형편없다”면서 “도굴꾼들은 전문가 못잖은 장비를 갖추고 동굴을 망쳐놓고 있으며, 일반에 개방된 관광동굴은 관람객과 인공 조형물로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술조사 단체조차도 동굴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날 일행이 동굴 속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먹는 동안에도 “뭐든 먹을 땐 한 입에 넣어 입을 꼭 다물고 드세요. 과자 부스러기 한 조각이라도 바닥에 떨어지면 동굴 오염이 시작됩니다”라고 단단히 일렀다.

이날 탐사활동은 4시간여 만에 끝났다. 다시 동굴 입구 밝은 세상에 나왔을 때 온몸은 진흙투성이였고, 팔다리가 쑤셔오기 시작했다. 김 부소장은 그러나 또 다른 탐사를 위해 단양으로 가야 한다며 서둘러 채비를 했다. 도로공사 작업장에서 동굴이 발견됐다고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새로 발견된 동굴인데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 봐야죠.”
 김 부소장은 인사도 채 마치기 전에 바쁘게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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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탐사를 시작하기 전 기념촬영. 이 때까지는 옷의 상태가 양호했다. (허정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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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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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2008/07/26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나 재미있게 보고 갑니다..^^

    이번엔 국내편이시네용..^^

  2. soko 2008/07/27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