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북한 개성.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개성으로 향했다.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방치됐던 북관대첩비를 101년 만에 북한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행사에 동행취재를 나선 것이었다. 광화문에서 경의선 도라산역 남북출입국사무소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북한을 가는 것은 해외여행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통일부에서 여권 비슷한 방북증명서를 발급받고 남북출입국사무소에서 ‘출입국 신고’까지 해야 한다. 여행객들은 금속탐지기를, 수화물은 엑스선 검색대를 지나야 한다. 내가 개성을 방문한 2005년은 민간인의 개성 관광이 불허됐던 시기였다. 금강산 관광은 허용됐지만 개성은 갈 수 없었다. 금강산 관광특구 같이 통제된 지역이 아니라 개성이라는 실제 도시에서 북한 주민을 직접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도라산역 내 서울과 평양을 가리키는 이정표. (허정호 사진)>
남측 출입국사무소를 통과하는데 30분 정도 걸렸다. 출입국 수속을 모두 마친 뒤 일행을 태운 버스는 휴전선으로 향했다. 휴전선 남측 경계선에 다다르자 국군 두 명이 커다란 철책 문을 열었다. 반대편 철책문 너머로 무장한 북한 인민군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버스가 휴전선 철조망 문을 지나 북측으로 넘어가자 인민군 초소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부터는 인민군 지프가 에스코트를 했다. 지프 안에 무장한 채 앉아 있는 인민군을 보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대로 못 돌아오는 건 아닌가. 북한 관리들 변덕이 죽끓듯 하던데, 갑자기 심사가 뒤틀려 우리를 억류하겠다고 하면 어쩌지.’
물론, 남북한 당국 간 공인된 행사에 그런 불상사가 생길 리는 없었다. 하지만 경직된 인민군 병사 얼굴을 쳐다본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쳐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철책을 조금 지난 곳에 북측 출입국사무소에 버스가 다시 섰다. 버스에서 내린 일행은 경계를 서는 인민군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건물로 들어갔다. 길게 놓인 책상들을 사이로 북측 ‘입국심사원’과 우리 일행이 줄지어 섰다. 북한 사람을 코앞에서 대하긴 처음이었다. 숨소리도 들릴 거리였다. 하지만 서로 눈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이 없었다.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았다. 굳은 표정으로 여권과 수화물만 점검했다. 늦겨울 추운 바깥날씨만큼이나 냉랭한 대접이었다. 모든 일행의 신분확인 끝난 뒤 마침내 휴전선 북측 철책문이 열렸다. 버스가 스스르 북쪽 땅으로 미끌어졌다. 뒤를 보니 더 이상 국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여기부터 북한 땅인가!
<북한을 가려는 사람에게 통일부가 발급하는 방북증명서. 방문목적과 기간 등이 적혀 있다.>
버스는 북한 병사들을 뒤로하고 북으로, 북으로 내달렸다. 옆으로 개성 공단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공단지대 풍경과 비슷했다. 100만평 대지에 큰 도로가 잘 닦여 있고 듬성듬성 공장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신원 에벤에셀’ ‘한국토지공사’ 등 눈에 익은 간판들이 보였다. 개성 공단은 북한보다는 남한의 손길이 더 많이 닿는 곳이었다. 도로나 철제 담장, 가로등이 모두 남한식이었다. 개성공단을 벗어나서야 ‘진짜 북한’이 시작됐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도로엔 차가 거의 없었다.
개성은 멀지 않았다. 휴전선에서 개성까지 약 40분. 그렇게 가까운 곳에 북한 ‘제2의 도시’ 개성이 있었다. 3월 초였지만 아직도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개성 외곽의 산은 대부분 민둥산이었다. 상당히 높아 보이는 산 거의 꼭대기 지점까지 나무가 없었다. 덮인 눈 사이로는 붉은 흙이 드러났다. 특히 마을에 가까운 산에는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 보기가 힘들었다. 버스에 동승한 행사 관계자가 설명했다.
“산에 나무가 없는 게 보일 겁니다. 북한 주민들이 땔감으로 쓰려고 너도나도 베어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오늘 같은 겨울 풍경이 여름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그나마 쌓인 눈이 민둥산을 덮어 정겹기라도 하거거든요. 눈이 없는 계절의 벌거숭이 산, 마을은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말 그대로 적나라(赤裸裸)한 모습이었다. 생기 넘쳐야할 봄 여름 풍경보다 차가운 눈 덮인 겨울 풍경이 낫다니, 가슴이 아려왔다.
마을에 보이는 가옥엔 30년은 족히 됨직한 오래된 기와들이 흉물스럽게 지붕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그런 기와도 대부분 떨어져 나갔다. 창문엔 유리 대신 비닐이 바람을 막아는 주는 집들이 곳곳에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닐 창은 힘없이 펄럭였다. 한 식료품 가게 앞에는 50여명은 돼 보이는 주민이 줄을 서 있었다. 개성까지 가는 동안 차량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개성에서 평양까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승용차 한 대 마주치기가 힘들 때도 있다고 한다. 버스 서너 대가 줄지어 가는 우리 일행을 주민들이 그토록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 보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에는 남한에서 온 것임을 암시할 만한 것은, 한글이든 영어든 모두 가렸다. 다만 차량 옆면에 ‘북관대첩비 101년만의 귀환’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여 놓았을 뿐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개성 시민들. (AFP사진)>
개성 시내에 풍경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보였다. 기실은 휴전선을 넘어서면서부터 풍경이 그랬다. 디지털카메라 특수촬영 기능으로 찍는 ‘세피아’ 사진과 비슷했다. 짙은 원색은 없고 흐릇한 파스텔톤의 색채만 남아 있었다. 60년대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빛이 다 바랠 대로 바랬다. 빨강 파랑 노랑 등 원색은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생명력의 상징인 ‘초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계절이 이른 탓도 있지만 가꾸어지는 나무도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옷색깔도, 건물의 외벽도 간신히 옅은 색감만 간직하고 있었다.
‘심장을 바치자 어머니 조국에!’
빛바랜 흑백 도시에 선동문구만은 핏빛으로 도드라졌다. 큰 건물 입구와 벽면, 사람 많은 네거리엔 어김없이 커다란 선동문구가 보였다. 대부분 새빨간 색으로 적어놓은 선동구호들은 핏줄처럼 개성 시내 요지에 퍼져 있었다. ‘21세기 횃불 김정일 장군 만세!’ ‘미제를 타도하자!’ ‘21세기 선군정치 만세’…. 이날 내가 북한 땅에 있음을 가장 실감하게 하여 준 것은 이들 선동문구였다. 자극적으로 내걸린 선동문구들은 생명력이 사라진 흑백의 개성 거리와 대조적이었다. 곳곳에 내걸린 선동구호들은 마지막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혈액 공급을 받는 것처럼 처절하게 다가왔다.
개성에도 고층 건물들은 있었다. 높은 것은 10층이 되는 것도 있었다. 베란다마다 가득 쌓인 연탄이 눈에 띄었다. 산에 나무는 다 베어갔고, 아파트는 연탄을 떼고…. 북한의 극심한 전력난이 여실히 드러났다. 큰 길 가를 따라 아파트 등 신식 건물이 제법 늘어서 있었다. 대로변 건물에는 새로 칠한 도색이 주변과 어울리 않게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바로 뒤편에는 60년대식 건물들이 즐비했다. 아스팔트가 포장된 거리엔 아직도 달구지가 짐을 싣고 다녔다. 건물만 60년대식이 아니라 삶 자체가 그 시대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거리엔 군복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 남루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많은 것도 이채로웠다. “북한에서 선글라스와 금장 손목시계가 최고의 선물”이라고 누군가 설명했다.
점심 식사는 개성 유일·최고의 호텔이라는 자남산려관에서 했다. 개성에서 가장 좋은 접객시설이라 했지만 우리의 기준으로는 소박해 보였다. 대리석 외관은 무게감 있게 보였지만 내부 장식은 썰렁했다. 난방마저 시원찮아 식당인 대연회장에선 입김이 보일 정도였다. 음식은 남한에서 먹는 것과 비슷했다. 돼지갈비, 오징어 졸임, 각종 튀김과 전, 시래깃국 등. 조미료를 많이 넣지 않아서인지 맛은 자극적이지 않았다. 일행 중 일부는 음식이 맞지 않는다며 과일만 연신 집어 먹었다. 그러나 과일 맛 역시 민숭민숭했다. 비료가 많지 않은 북한은 땅이 기름지지 않아 과일도 당도가 떨어진다고 했다.
<개성 제1의 호텔이라는 자남산려관 입구에서>
식당에서 여성 접대원 동무에게 말을 걸었다. 남측 관광객이 금강산에 가면 의례 북한 관광안내원에게 말을 시켜 문제를 일으킨다더니, 나도 그랬다. 북한 동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얘기 한 번 나눠 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루기란 쉽지 않았다. 북한에선 식당 종업원에게 ‘아가씨’라고 불러선 안 된다고 했다. ‘동무’ 또는 이름표에 적힌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했다. 어색한 호칭은 다 빼고 대뜸 물었다.
“이런 식사 한 끼에 얼마 정도 합니까?”
“조(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질문에 얼굴부터 붉히던 아가씨, 아니 접대원 동무는 이 말과 함께 음식 접시만 내려놓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남측 사람과 대화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는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대화는 그렇게 끊겼다. 자남산련관 식당 접대원은 거의 개량한복을 입고 있는 젊은 ‘아가씨’들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들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볼에만 살짝해 순진해 보였다.
이날 북관대첩비 반환 공식행사는 고려박물관에서 열렸다. 고려시대 사적인 성균관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고려박물관에는 금속활자와 고려청자 등 유물 1000여점이 전시돼 있다고 했다. 일정이 길지 않아 제대로 둘러 보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기념품 하나는 챙겼다. 남측에서 손님들이 온다고 급히 벌인듯한 박물관 좌판 매대에서 그림을 한 점 샀다. 북한 화가 작품으로 그림은 조악해 보였지만, 기념으로 사두었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문화재청의 유홍준 청장은 10cm크기의 미니어처 고려청자를 몇 개 사서 일행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개성의 고려박물관에서 판매하는 미니어처 고려청자. 높이가 약 10cm정도 밖에 안되지만 청자 색깔은 제법 그럴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 들렀다. 자남산련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선죽교는 개성에서 꽤 유명한 관광지인 듯했다. 그럴듯한 안내원도 배치돼 있고, 사적지임을 알리는 간판도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정몽주가 이방원 일당에게 철퇴로 피살될 때 흘렸다는 핏자국은 선죽교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모두들 그 혈흔 뒤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비좁은 선죽교는 한바탕 소란을 겪어야 했다. 선죽교는 통행을 제한에 건너다닐 수 없었다. 대신 바로 옆에 나란히 돌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했다.
<개성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 선죽교. 가운데 기둥 앞에 정몽주의 핏자국이 불그스름하게 아직도 남아 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돌아오는 길의 북측 출입국관리소 더욱 까다로웠다. 허리에 총까지 찬 북한 측 검사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식사진기(디지털 카메라)를 켜서 찍은 사진을 다 보여주시라요.”
남측 일행은 관광지나 북측이 지정한 장소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북한 시내나 주민의 모습을 찍는 건 금지돼 있었다. 이는 이날 행사를 위해 남북 간 합의한 사항이었다. 일행 모두가 디지털 카메라를 켜 찍은 사진을 다 보여준 뒤에야 통관할 수 있었다. 일행이 탄 버스가 남측 군사분계선을 넘어서자 국군 병사들이 에스코트했다. 어찌나 반갑고 늠름해 보이던지. 평소에 그렇게 볼품없다고 생각했던 군국 위장복조차 멋있게 보였다.
남쪽으로 달리길 한 시간여. 때마침 퇴근시간 러시아워에 걸려 차량의 홍수에 휩싸였다. 화려한 서울의 야경 속에 개성에서 잠시 ‘죽었던’ 오감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의 자동차와 화려한 거리의 조명이 시각을 자극했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는 활력의 소리로 귀를 깨웠다. 동맥처럼 끝없이 늘어선 차량 후미등의 행렬은 북한의 선동구호를 대신해 생명의 박동을 전달했다.
버스가 다시 아침에 출발한 광화문에 섰다. 이날은 앙골라와의 국가대표 축구 평가전이 벌어지던 날이었다. 광화문 거리엔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많은 젊은이가 모여 있었다. 골이라도 터졌는지 다 같이 그 익숙한 소리를 외쳐댔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아! 돌아왔구나.”
완전 딴 세상이었다. 불과 한 시간 여 거리에 있는 서울과 개성, 남북한 두 도시의 풍경은 이렇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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