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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파키스탄 훈자(카리마바드).

 훈자 마을 뒤편 산 쪽 우러러 보이는 곳에 하얀색 성이 하나 있다. 훈자마을 가장 높은 곳, 가장 깊은 곳에 발티트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계곡에 맞닿아 우뚝 선 모습이 경외감을 자아냈다. 평평하고 높은 벽면 꼭대기에 불쑥 튀어나온 방 두 개를 기다란 나무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구조는, 마치 백성들이 왕실을 떠받드는 듯한 모습을 연상시켰다. 온통 하얀색으로 칠이 된 벽은 ‘떠받드는’ 기둥을 더욱 부각시켰다.

훈자마을에서 본 발티트성.

 가이드 아미르를 따라 발티트성으로 들어갔다. 입구는 장엄하지 않았지만 정갈한 모습이었다. 성벽을 따라 가파른 언덕이 촘촘한 돌담길 옆으로 쭉 연결돼 있었다. 성문에 다다른 아미르가 안내소로 보이는 곳을 들어갔다. 아미르는 파키스탄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노인을 데리고 나왔다. 발티트성 관리인이었다. 원래 아는 사이였던지 서로 반가운 체를 해댔다. 아미르가 손가락으로 내 쪽을 가리켰다. 나를 소개하는 모양이었다. 파키스탄 우르두어로 대화가 오갔지만, 이번에도 한마디는 알아들었다.
 “……아라파트!”
 아미르가 또 ‘아라파트‘ 얘기를 꺼냈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만난 사실이 파키스탄 주민에게 대단하게 받아들여지는 건지, 아미르만 대단하다고 호들갑을 떠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미르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아라파트를 만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번에도 효과는 있었다. 발티트성 관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반갑게 악수를 청해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후르 샤입니다. 이곳 관리인이죠. 아라파트를 만나셨다고요.”
 “아, 예….”
 “큰 일 하셨네요. 자 따라오시죠. 네가 훈자 왕국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샤는 성큼성큼 언덕길을 올랐다. 한걸음 뒤에 따라오던 아미르를 돌아봤다. 아미르가 나를 보더니 찡긋 윙크를 한 번 했다. 한마디로 ‘아라파트가 먹어준다’는 표정이었다. 현지 물정은 현지인이 가장 잘 아는 법. 나는 아미르가 하는 대로 그냥 나뒀다.
 

발티트성 외벽에 나무기둥들이 새로 지어진 별실들을 아슬아슬하게 떠받치고 있다.


 발티트성 내부는 어둡고 복잡했다. 미로처럼 엮인 복도와 통로가 이리저리 뻗어 있고 층층이 복잡하게 겹쳐 있었다. 각층은 뚜렷이 구별되지 않아서 바닥이 층간에 겹쳐 있는 곳도 있었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문턱도 제각각 다르고, 방방마다 모양과 양식도 달랐다. 채광이 잘되는 방이 있는가 하면, 창문이 작아 답답한 방도 있었다. 환풍 시설은 몽골의 양식, 반지하로 된 감옥은 서양의 것을 모방한 것처럼 보였다. 
 ‘이게 훈자 스타일인가? 주민들도 동서양이 만난 혼혈인이 많더니, 건축도 그런건가? 그래도 왕궁이었다는데 왜 이렇게 뒤죽박죽 지었을까?’
 관광객들의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었다. 오래도록 관광객을 상대한 샤가 내 표정을 읽고는 대번에 설명을 늘어놨다.
 “발티트성은 약 700년 전에 지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단층으로 만들어졌는데, 차차 2층, 3층으로 규모를 키웠습니다. 게다가 훈자 왕들이 이웃나라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그들의 취미대로 성을 조금씩 손봤습니다. 그 때문에 다양한 문화양식이 표현돼 있습니다. 특히 티베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설명을 듣고 보니 중국 시짱(西藏) 자치구에 있는 티베트 포탈라궁하고도 비슷하단 느낌이 들었다. 전면 전체를 하얗게 칠한 것이며 비탈지게 올라가는 입구, 조그맣게 난 창들이 흡사 포탈라궁 축소모형 같았다.

훈자왕의 침실 내부



발티트성 내부. 화로가 있는 방



부엌

 

발티트성 내 반지하 감옥의 모습. 어둡고 음산한다.



19세기 훈자왕국을 침공한 영국군도 발티트성에 영향을 미쳤는데, 3층에 자리 잡은 발코니와 방들이 그때 개조된 것이라고 했다. 영국인들이 개조했다는 3층에 올라왔다. 더 이상 샤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왜 발티트성이 이곳에 자리 잡았는지, 영국인들이 왜 3층에 손을 댔는지 설명 없이도 알 수 있었다.
 발티트성 3층 발코니에서는 훈자 구석구석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훈자 계곡이며 발아래 자리 잡은 훈자 마을, 발티트성 뒷산 정경까지 빠짐없이 들어왔다. 옛날 훈자 왕들은 이곳에 올라 백성들의 삶을 지켜 보았을 것이고 그들의 걱정을 들어주었을 것이었다. 사랑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배를 불리고 편안하게 해 줄 수 있을지, 하늘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 고민했을 것이었다.



발티트성 3층 발코니에서 본 훈자 밸리 전경. 아래 쪽에 훈자 마을과 운동장이 보인다.

 나는 훈자의 왕이라도 된 양, 난간에 단단히 몸을 기대 훈자 마을을 곳곳을 살폈다. 가슴 깊이 시원한 공기도 들이마시며 왕의 정취를 만끽했다.
 ‘이처럼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이라면 왕 노릇도 할만 하겠군.’
 그때 아미르가 끼어들었다.
 “멋있죠?”
 “네. 정말 멋집니다. 카슈미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네요.”
 자신들의 문화유산이 자랑스럽다는 듯 아미르가 덧붙였다.
 “작년에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바로 그 자리에서 훈자 절경을 감상했죠.”
 “찰스 왕세자가 훈자에 왔었어요?” 
 “네. 두 번째 부인 카밀라와 함께요.”
 “왜 왔죠? 그냥 재미삼아 왔나요(for fun)?”
 아미르 대답이 걸작이었다.
 “For fuck(재미보러 왔죠).”
  1초 동안 어색한 침묵. 잘못 들었나? For fuck? 하지만 바로 뒤 큰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우하하하!” “for fuck!” 
  아미르도 나도 파안대소를 했다. 그동안 문화재 관리인으로 근엄한 표정을 지어왔던 샤도 참지 못했다. 하하하!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for fuck’이란 말을 몇 번이나 되뇌며 눈물나도록 웃었다. 사실 아미르와 나는 지난 사흘을 같이 지냈지만, 아직은 그렇게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다. 여행객과 가이드로서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하지만 가이드의 이 한 마디는 우리 사이를 친구로 만들어 버렸다.
 

발티트성에서 본 훈자 마을. 아래쪽 언덕 끝부분에 보이는 하얀색 큰 건물이 현재 훈자왕의 새로운 거처라고 한다.


 훈자왕은 현재 발티트성에 없다. 왕은 1945년 발티트성을 떠나 마을에 더 가까운 알티트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로 발티트성은 버려져 있었지만, 1990년대 들어 대대적인 복원 사업이 시작됐다. 발티트 헤리티지 펀드(BHF) 등 국내외 여러 기관의 도움으로 1996년 복구작업을 마친 발티트성은 1996년 다시 일반에 공개됐다. 그때의 복원작업이 성공적이었는지, 발티트성은 2005년 타임지에 의해 아시아의 최고 유물 가운데 하나로 꼽혔으며, 2004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문화재 보존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해놓은 상태다. 찰스 왕세자가 이 험한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와 이곳을 방문했을 정도니 그 문화재적 가치나 주변 자연 경관은 세계적인 자랑거리라 할만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방문객 수가 크게 줄었다. 계속된 인도·파키스탄 국경분쟁과 파키스탄 북서 산악지대에서 벌어진 테러와의 전쟁 등으로 관광객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한때 국내외에서 최고 인기 관광지로 꼽히던 카슈미르의 관광산업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샤는 “한 해 8만 명에 이르던 외국인 방문자 수가 9·11테러 이후 수백 명대로 줄었어요”라며 심각성을 말했다.

발티트성의 뒷면 성벽.

 발티트성 구경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샤가 또 한 번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훈자 왕조는 그동안 많은 외침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비록 상징적인 왕이지만 훈자 주민들은 여전히 그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있죠.”
 일행이 다시 처음 출발했던 성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훈자 계곡을 향해 힘차게 뻗어있는 대포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대포 뒤편에 서서 어디를 겨누고 있나 살펴봤다. 저 멀리 훈자마을 입구쯤에 조준 된 것 같았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음이 느껴졌다. 뒤에 섰던 샤가 한마디 거들었다.
 “훈자 왕국을 지키기 위한 대포죠.”
 “아 그렇군요. 그런데…, 대포가 달랑 하나입니까?”
 “예? 예. 하나예요.”
 “훈자 왕국을 지키는 대포가 달랑 이거 하나예요?”
 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웃음을 참는 것이었다. 자신도 이제껏 발티트성과 그 대포에 대해 자랑해 왔지만, 정작 성을 지키는 대포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처음 인지한 것 같았다. 왕궁을 지키는 대포가 달랑 하나라니! 생각해보니 그도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모두 허리를 꺾어가며 웃어댔다. 이번엔 “only one(달랑 하나), only one”이었다.
 나중에 따로 알고 보니, 발티트와 훈자를 무장해제한 것은 영국군이었다. 훈자 마을에는 원래 망루 대와 요새처럼 만들어진 성벽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891년 영국군이 왕국을 접수하면서 모두 파괴해 버렸다. 발티트성에도 감시탑과 요새 시설이 갖춰져 있었지만 이때 영국군에 의해 부숴졌다.

 발티트성 아래 크리켓을 하는 청년들의 소리가 왁자했다. 장비라고는 뭉툭해진 나무 배트와 시커멓게 손때가 낀 가죽공이 다였지만, 여남은 명의 청년들이 행복해 보였다.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마을을 뒤흔들었다. 대단한 플레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왕에게 인사를 한 것인지, 구경꾼인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왕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그냥 행복했다. 많은 욕심도 없었고, 작은 것에도 감사했다. 훈자 마을 오후의 한 장면은 그랬다.

발티트성 아랫마을 주민들.


훈자마을 주민이 우리 일행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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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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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카리스턱 2009/01/23 2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으로 보니 역시나 구름이 많군요 그동네 날씨는 여전하네요
    제작년 봄이 다가올즘에 갔었는데 그당시에도 눈과 함께 길이 묻혀서 길이 뚫릴때까지 기다리곤했는데 소코님 사진을 보니 묵혀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부러움에 배가아프네요

    코쇼상의 저녁과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서 본듯한 동네주민들, 살구꽃...

    아 배아퍼요!!! 건강하게 여행하세요~

    ps : 찰스왕과 대포 재미있었습니다 ㅋㅋㅋㅋ

  2. BlogIcon soko 2009/01/23 2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훈자, 좀처럼 가기 힘들지만 정말 좋은 곳이죠. 저랑 추억을 공감하시는 분이 있다니 반갑네요. 감사합니다.